2025년 4월

READING ❶

믿음과 광기 사이에서
길을 잃다

<계시록>으로 돌아본 종교적 ‘연니버스’

글 _ 조재휘(영화평론가)

2025-04-01

“주께서는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 <구약성서> 욥기 13장 24절

<계시록>(2025)에서 중요한 시각적 모티브는 ‘얼굴’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숨은 그림’(Vexierbild)으로서의 얼굴. 이따금씩 구름이나 산의 능선 같은 자연의 형상을 들여다보면, 때로는 너무나 닮아 보여서 인간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합리적인 정신의 소유자라면 자연 현상으로 인한 우연을 두고 떠올리는 이러한 연상 작용이 어이없는 망상이라고 여길 수 있겠으나, 이성적 사유를 넘어서 일종의 영감(靈感)을 필요로 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 예컨대 예술가나 눈앞의 형상을 어떤 조짐으로 받아들이는 종교인들에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서양미술사에는 풍경과 사물을 그렸지만 실은 그 안에 인간의 형상이 교묘하게 숨어 있는 그림이 유행한 때가 있었다. 이를 ‘인형풍경’(人形風景: Anthropomorphic Landscape)이라 부른다. 마니에리스모와 바로크 시대의 이 양식은 교회 미술에도 적용될 만큼 종교와도 관련성이 깊었다. 예컨대 독일의 츠비팔텐 성모 수도원의 천장화와 같은 경우, 화가는 그림의 전체 구도에 신의 얼굴 대신 일부러 섬뜩한 두개골의 형상을 숨김으로써 삶의 무상함이라는 중세의 오랜 가르침을 상기시키고자 했다. A4 용지에 프린트된 권양래(신민재)의 얼굴이 지붕에서 샌 빗물에 번지며 일그러진 모습이나 천사의 모습을 닮은 구름 등, <계시록>에서 개척 교회를 꾸리는 젊은 목사 성민찬(류준열)의 눈에 갑자기 풍경 속에 감추어진 특정한 형상이 포착되고 주목하게 되는 건 어쩌면 여기서 모티브를 따온 것인지도 모른다.

유치원에서 누군가 아이를 데려갔다는 아내의 전화. 자신의 아이가 납치되었을지 모른다는 민찬의 착각은 교회 신도인 어린 여학생 신아영을 따라서 그의 교회로 들어온 권양래의 발목에 부착된 전자발찌로 인한 것이다. 민찬은 성범죄 전과가 있는 양래가 범인일 것이라는 확신으로 급발진한다. 오해로 인한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아집(我執)에서 <계시록>의 사건은 촉발된다. 나중에 민찬의 아이는 그저 친구 집에 놀러갔을 뿐임이 밝혀지지만, 이미 사건은 벌어지고 난 후다. 폭우가 쏟아지던 그 밤, 수상해 보이는 양래를 미행하다가 들킨 민찬이 산중에서 난투를 벌이던 도중 양래가 발을 헛디뎌 산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그 순간 민찬의 시야를 통해 보게 되는 산의 절벽에 예수의 얼굴 윤곽이 덧씌워진다. 민찬은 이를 일종의 ‘계시’로 받아들인다. 이와 유사한 형상은 신축 중인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를 맡으라는 은사의 권유를 받아들일 때 포커스 아웃으로 흐릿하게 비치는 목사실의 기물들에서 다시 나타난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이런 태도는 인간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을 풍경과 사물, 그리고 우연을 자기 의도대로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착각에 지나지 않지만, 민찬은 확신에 찬 광신자가 되어 양래에 의해 납치된 학생 신아영이 이미 죽었고 자신의 사명은 ‘악마 같은 놈’을 처단하는 것이라며, 실상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는 시도를 합리화하기에 이른다. 온전한 앎에 이르지 못한 채 제한된 시야에 갇혀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우를 범하는 건 인간사의 흔한 어리석음이지만, 자신이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임을 돌아보지 않고 스스로를 절대화하려는 데서 죄악은 시작된다. 구제불능의 악인과 타락한 종교인, 그리고 광기라는 연상호 필모그래피의 익숙한 레퍼토리는 이 근작에서도 다시금 재생산되고 변주된다.



종교적 묵시록, ‘연니버스’의 또 다른 흐름 연상호의 필모그래피를 일컫는 신조어인 ‘연니버스’는 실은 좀비 아포칼립스를 다룬 <부산행>(2016)과 <반도>(2020), 그리고 애니메이션 <서울역>(2016)이 소재뿐 아니라 같은 위상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온 표현일 것이다(<반도>의 프리퀄 격인 웹툰 <631>과 단편 애니메이션 <집으로>(2016)도 이 범주에 들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종교와 관련된 일련의 작품군을 꾸준히 작업해 왔고, 이 역시 현대의 한국 사회라는 동일한 지평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라고 가정한다면 ‘연니버스’의 외연은 좀 더 넓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이비>(2013)와 드라마 <지옥>(2021), <지옥 시즌 2>(2024), 그리고 넷플릭스 영화 신작 <계시록>이 연니버스의 또 다른 흐름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종교적 모티브에 대한 연상호의 관심은 그가 <돼지의 왕>(2011)으로 주목받기 이전, 로토스코핑(Rotoscoping) 기법으로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 <지옥-두 개의 삶>(2003~2004)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천사로부터 지옥에 떨어질 예정이라고 통보받은 평범한 직장인과 반대로 천국에 갈 것임이 정해졌지만 지옥으로 가게 된 미술학원 강사 여성의 이야기를 각각 다룬 이 두 작품에는 죄인이 아닌 이들도 재해에 휩쓸리는 것마냥 고지를 받으며, 선택과 탈출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후 시리즈 <지옥>이 지닌 세계관의 기본 설정은 이 단편에서부터 원안이 잡혀 있었던 셈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초자연적 설정을 현실의 무대로 끌어들인 연상호는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디스토피아적 파국의 가짓수, 출구 없는 지옥도(地獄圖)를 전시적으로 펼쳐내 보이는 데 중점을 둔다.

<지옥>과 <지옥 시즌 2>에서도 작중 인물 상당수는 마치 파국과 파멸의 어트랙션을 선사하기 위한 꼭두각시 인형으로서의 운명을 점지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점에서 연상호는 비록 종교를 창작의 소재로 끌어들이긴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종교극으로서의 성격은 전혀 띠지 않는 작품을 만들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세계 속에서 종교는 사회적 비극의 원인 제공이자 갈등의 축으로 디스토피아 서사를 끌고 나가기 위한 장치로서 기능할 따름이지, 구원의 가능성과 인간성 회복, 계몽의 테마는 그 특유의 전망 없는 염세주의로 철저히 부정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니버스’에서의 종교가 갖는 성질은 근본적으로 <서울역>에서의 좀비 아포칼립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지옥> 시리즈에서의 종교나 <부산행>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서울역>에서의 좀비 재난이나, 극한 상황에 내몰리고 이기심에 집어삼켜져 괴물화된 인간의 초상, 인간성 절멸과 사회 붕괴의 풍경을 끌어내고 합리화하기 위한 편의적 설정에 머문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시리즈 <지옥>이 가공의 초자연적 설정에 기반한다면 장편 애니메이션 <사이비>는 기독교계 사이비 교단을 끌어들여 사회파 리얼리즘에 방점을 찍는다는 점에서 작중의 세계를 조형하는 방식은 상반된다. 판타지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과 인물을 다룬다는 점에서 근작 <계시록>은 <사이비>의 연장선상에 두고 봄직한 영화다. 성민찬은 외진 변두리 지역에 개척 사역을 하러 온 젊은 목사로 종국엔 변질되어 거짓된 구원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사이비>의 성철우를 변형한 캐릭터이며, 수몰지구 촌동네의 폭군 민철이 지역사회를 잠식하러 온 교회에 대적하듯, 서로 대립하는 두 주역 모두 악한으로 묘사되는 점 또한 유사하다. <계시록>을 두고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색깔을 응축해 정리한 작품”이라 한 연상호 감독의 발언은 신파적 요소를 배제하고 그의 본령이었던 애니메이션 시절에 가깝게 회귀한 면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붕괴 직전에 놓인 공동체의 음울한 풍경을 소묘하며 이들 사회가 구조적으로 가망 없음을 메스로 해부하듯 들춰내 보인 <사이비>의 심도는 <계시록>에서는 상당 부분 퇴색되고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이비>는 애니메이션이면서도 영화 속의 공간 표현에 적잖은 비중을 두면서 수몰지구의 마을이 실재하며 그 안에서 캐릭터들의 동선이 생생하게 재현된다는 실사의 실감을 추구한 반면, <계시록>은 배우의 연기를 전달한다는 기능성에 매달리는 촬영과 과장된 연기톤, 스테레오 타입화된 악역으로 인해 현실적인 배경을 지닌 실사영화임에도 도리어 만화적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만약 <계시록>이 작중의 무대가 되는 지역사회의 일상적 풍경과 그 속에 감도는 공기, 인물의 동선을 세세히 재현하는 실감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영화는 <돼지의 왕>과 <사이비>가 얻었던 비평적 찬사를 다시금 실사에서도 재현하는 쾌거를 이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참신함과 진정성으로 돌아가기엔 연상호의 경력은 이미 너무 먼 길을 떠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총괄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신념이 우리를 어떻게 형성하는지 믿음과 인간성, 진실과 인식, 선과 악의 미묘한 경계에 대한 영화”라고는 하지만, 메시지는 피상적이게 된 반면 영화 속 세상은 실감을 잃었고, 단지 미칠 듯이 웃음을 터뜨리는 두 악인의 위악적인 포즈만이 남았을 따름이다.



알폰소 쿠아론과 만난 ‘연니버스’, 하지만… <계시록>이 일약 화제작으로 주목받게 된 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존재감에도 상당 부분 빚지고 있을 것이다. <칠드런 오브 맨>(2006)과 <그래비티>(2013), <로마>(2018)의 거장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연상호의 프로젝트에 참여하자 과연 두 감독의 색채가 어떤 식으로 융합되어 시너지를 발휘할지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완성된 영화는 아무리 보아도 <사이비>의 구도로 잠시 돌아간 연상호 근작의 경향성을 따르고 있지, 알폰소 쿠아론의 영향력을 의식하고 그걸 반영하고자 한 면면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프로젝트에서 알폰소 쿠아론의 참여와 기여도가 어느 정도 선까지 이루어졌는지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지만, 익히 그렇듯 총괄 프로듀서란 직위 자체가 작품의 연출에까지 일일이 통제력을 발휘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니 그 몫이 그리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계시록>에서 알폰소 쿠아론의 영향력을 타이틀 크레디트 외에는 찾을 수 없는 건, 앞서 짚어본 바와 같이 종교적 구원을 철저히 부정하는 연상호의 태도가 작품 전반에 철저히 관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알폰소 쿠아론은 정반대 지점에서 영화를 사유한다. 그는 우리 시대에 남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적 적자(嫡子)다(이 표현을 뒤집어 우리 시대 타르코프스키의 탕아(蕩兒)가 있다면 <안티 크라이스트>(2009)와 <멜랑콜리아>(2011)의 라스 폰 트리에일 것이다). 인류 멸절 직전의 사태 속에서 마지막 씨앗인 아기를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린 로드무비 <칠드런 오브 맨>은 스탠리 큐브릭 스타일의 스테디캠으로 형식만 바꿨을 뿐, 촛불을 꺼뜨리지 않고 온천을 건너려는 시인의 안간힘을 담은 <노스탤지아>(1983)의 롱테이크 시퀀스를 영화 전체로 확대한 변주이며, 이 장면은 <로마>의 엔딩에서도 파도 속에서 아이를 구해 나올 때의 기나긴 수평 트래킹으로 다시금 오마주된다. <그래비티> 또한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걸맞게 어트랙션화되었을 뿐, 지구에서의 삶과 중력에 다시 이끌려 오는 인물을 그린다는 점에서 다분히 <솔라리스>(1972)를 의식했음이 드러난다.

<계시록>은 인류의 구원을 진심으로 염원하는 감독과 이를 냉소하며 지옥도를 펼치길 즐기는 감독이 만나 하나의 프로젝트에서 손잡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그러나 양자 간의 충돌과 융합으로 일어났을 화학반응의 독특함은 완성된 영화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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